“저 자세를 안다. 오랜 시간 한자리에서 일한 사람만의 태가 있다” 서로 다른 연령·성별·분야의 베테랑 13인, 몸에 붙은 일과 삶 그리고 자부심의 기록 일이란 내게 무엇인가. 불안한 노동시장과 경기 침체로 자발적 퇴사·사이드 잡에 대한 고민이 커지는 각자도생의 시대, 때로 일은 그저 돈 버는 수단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은 늘 그 이상이다. 수면 리듬이 출근 시간에 맞춰지고, 일할 때의 자세 때문에 퇴근 후에도 몸이 뻐근하다. 업무 용어는 입버릇처럼 혀끝에 맴돌고, 인간관계나 관심사도 일터에 맞게 바뀐다. 좋든 싫든, 일은 내게 들러붙어 있다. 어느덧 나는 조금씩 나의 일로부터 빚어진 것이다. 그렇게 수십 년간 일을 몸에 붙여온 이들이 있다. 한자리에 붙박여 같은 일을 해온 숙련자들을 우리는 ‘베테랑’이라 부른다. 이들이 베테랑이 되기까지 일을 반복하며 갈고닦는 것은 기술만이 아니다. 몸은 인내하며 버틴 시간과 “일의 기억을 새기는 성실한 기록자”(12쪽)가 된다. 《베테랑의 몸》은 스스로 단련하는 시간 동안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체화된 기술과 일이 빚어낸 베테랑의 ‘몸’들을 드러내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사회문제에 맞서고 분투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꾸준히 포착해온 기록노동자 희정은, 서로 다른 성별·연령·분야의 베테랑 13인을 만나 인터뷰하며 몸-일-일터-사회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를 풀어낸다. 저자는 뾰족한 문제의식과 세밀하고도 담담한 문장으로 질병·체형·자세·표정 등 몸의 변형은 물론, 어투·걸음걸이 등의 습관과 일의 태도까지 독자에게 꺼내어 보인다. 여기에 온빛사진상(사회의 생활상과 사건을 충실히 드러내는 다큐멘터리 사진 상)을 두 차례 수상한 사진작가 최형락이 고유한 시선으로 베테랑의 모습을 담아내며, 일하는 몸들을 더욱 입체적으로 재현한다. 직업적 특징과 성격적 면모, 생의 굴곡에 따라 저마다 달리 다듬어진 베테랑의 몸들은 텍스트와 사진 이미지를 통해 더욱 풍부한 맥락 속에서 독자에게 다가간다. 이른 아침 작업장, 주방, 목욕탕, 출산실,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의 성실은 성실하게 몸에 새겨진다. (중략) 통증이 자세를 만들고, 자세는 체형을 만든다. 반복된 행동은 버릇과 습관으로 남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뱃심 든든한 몸통, 짙게 그을린 피부, 딴딴한 장딴지, 표정이 다채로운 얼굴, 짧게 다듬어진 손톱, 갈라진 발바닥, 우렁찬 목청, 청력 낮은 귀는 자신의 것이 된다. 젊은 시절, 아직 노동을 거치지 않았을 때는 상상하지 못했던 몸을 안고 살아간다. _12~13쪽 중에서 책에 등장하는 베테랑들은 자신의 몸의 변형을 마주하는 데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 틈을 자부심으로 채우거나, 비슷한 문제를 직면한 동료를 챙기며 문제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움직인다. 그렇게 저마다 변화된 몸으로 살아가며, 일에 대한 태도뿐 아니라 일터에서 마주한 문제와 괴리까지 스스로의 언어로 해석하고 진단한다. 이를테면, 어부와 마필관리사의 일터에서는 비인간 동물에 대한 존중이, 조산사의 일터에서는 생명과 죽음에 대한 고민이, 배우와 일러스트레이터의 일터에서는 젠더 역할에 대한 고민이, 안마사와 세신사의 일터에서는 늙고 병들고 장애를 가진 몸들이 논의된다. 30대 여성부터 아흔의 남성까지 각기 다른 얼굴의 베테랑들은, ‘숙련공’이나 ‘베테랑’에 대한 고정적 이미지(기계 설비를 다루거나 육체노동을 하는 초로의 남성 이미지)를 조각낼 뿐 아니라 노동 중에 생긴 신체 변형과 손상의 의미도 다층적으로 만든다. 자신의 일상을 침범하는 일터의 습관·강박 역시 훈장과 결함 사이를 널뛴다. 우리는 모두 끊임없이 일을 한다는 점에서,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완성’된다. 하지만 반대로, 그 일을 경험해보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이 하는 노동 바깥의 노동이 어떤지 세세히 알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은 그릇된 환상이나 낙인의 꼬리표가 붙는다. 《베테랑의 몸》은 저자와 베테랑의 말을 빌려 노동 안팎의 시선을 고루 교차시키며, 왜곡된 시선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를 온전히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는 저자 역시 베테랑 노동자와 마주앉아 그가 어떻게 자신의 일과 몸을 바라보는지를 먼저 들어본 후에야 비로소 그의 노동을 이해할 수 있는 점과 닮았다. 누군가가 어떻게 빚어졌는가, 즉 몸에 붙어버린 일과 생의 흔적, 자부심과 문제의식들을 고루 떼어내 볼 때, 우리는 섣부른 동정이나 시혜, 차별적 시선을 거두고, ‘숙련의 시간을 거치며 빚어진 것들’에 대해 오롯이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낯설고 흥미로운 일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이것이 나의 환상임을 안다. 우리는 타인의 직업에 환상을 품거나 편견을 가지거나, 그도 아니라면 무지하거나 무심하니까. 그래서 그의 일터로 간다. 평생 ‘일’을 다뤄온 사람과 마주 앉아 그의 손끝에, 어깨에, 발뒤꿈치에, 입가에 노동이 남긴 흔적을 본다. 관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흔적을 따라잡다 보면 노동이 삶에 새긴 자국, 때론 어떤 저력과 만나게 되는데 그제야 비로소 누군가의 일에 환상과 편견을 가지는 일이 멈춘다. _18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