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중 조선군이 거둔 몇 안 되는 승전 중 하나인 ‘김화 백전전투’의 비밀을 풀다 16~17세기 동아시아 3국은 큰 변동을 겪었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임진왜란(1592~1598)이었다. 조선 침공의 실패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붕괴하고, 에도막부가 성립하였다. 대규모 구원병을 파견하였던 명은 그 몰락의 속도가 빨라졌다. 인적, 물적으로 큰 피해를 본 조선 왕조는 새로운 지배 질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왜란으로 인한 혼란을 미처 수습하기도 전에 두 차례의 호란을 겪게 되었다. 명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만주의 여진족은 후금을 건국하고, 명과 패권을 다투기에 이르렀다. 후금과 그 후신인 청은 배후의 조선이 친명정책을 추구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1627년과 1636년 두 차례 조선을 침입하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그것이다. 정묘호란은 양국 간의 화의로 종결되었다. 하지만 병자호란은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1636년 12월 14일 한양 인근에 도착한 청군의 선봉대는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는 한편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이어 청 태종이 대군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합세하였다. 남한산성에 고립된 조선 조정은 각도의 근왕병이 구원해줄 것을 기대하였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청군에 의해 격퇴되고 말았다. 김준룡 휘하의 전라도 근왕병이 경기도 용인 광교산에서 청군을 무찔렀지만 곧 해산하였다. 유림이 지휘하던 평안도 근왕병은 강원도 김화의 백전(栢田)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인조가 곧 항복함으로써 이들은 근왕병으로서의 임무를 다할 수 없었지만, 이 승리는 병자호란 중 조선군이 거둔 몇 안 되는 승전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