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탈식민화, 반세계화에 관한 동시대 미술가들의 다양한 실천을 다룬 교양서 착취와 빈곤, 폭력이 만연한 오늘의 세계에서 미술과 미술가는 무엇을 하고 있으며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책은 인류세로 불리는 지금 여기의 행성지구, 그리고 인간을 비롯한 지구 생명의 현존 방식에 문제의식을 둔 동시대 미술가들을 소개한다. 고통의 현장에 다가가 외면당한 자/것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떠도는 무수한 작은 빛”과 같은 미술실천들. 저자는 그 태도와 행위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세심히 관찰해서 정연하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전한다. 이 책에서 동시대 미술의 기준은 1989년이다. 이 해에 베를린 장벽 붕괴, 텐안먼 사건, 월드와이드웹의 등장 등 세계 정치사회문화의 지형을 바꾼 일들이 일어났으며 미술계 역시 크게 영향받았다. 다만 여기서는 동시대 미술을 하나의 시대구분으로 수용하기보다는 동시대성의 3대 전환인 세계화, 탈식민화, 기후변화로 수렴하는 독특한 미술 현상으로 이해한다. 저자는 특히 제삼천년기(2001-3000) 초반에 심미적 자율성과 개인의 자유 개념을 뛰어넘어 사회정의와 생태적 번영을 추구하면서 다양한 매체를 통해 ‘반란적 상상 실험실’을 마련한 미술가들에 집중한다. 책 제목의 ‘파스카(pascha)’는 옛 히브리말의 그리스어 음역으로, 우리말로는 ‘지나가다, 건너가다’의 의미이다. 눈앞의 세계를 그저 지나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서 기꺼이 가로질러 건너가는 이들의 뜨거운 마음을 만날 수 있다. 국내 저자가 우리말로 지구미학(geoaesthetics)의 범주에서 동시대 미술을 다룬 첫 책이라는 점도 뜻깊다. 동시대 미술과 행성지구의 문제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와 연구자, 예술의 대항정치적 역할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읽기를 권한다.